‘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이 행동들이 모여 특별한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앰네스티 50년 역사였다.
1961년 5월 28일, 영국 옵저버(The Obserber)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한 주의 어느 때라도 신문을 펼쳐 보라. 그러면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그 나라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이유로 구금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되고 있다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문 독자들은 진저리 쳐지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만약 전 세계에 걸친 이 진저리 쳐지는 무력감들이 하나의 행동으로 모아진다면 보다 효과적인 그 무엇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한 술집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 했다는 이유로 두 명의 학생이 7년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네슨(Peter Benenson)이 분노하여 작성한 ‘잊혀진 수인들(The Forgotten Prisoners)’이라는 기사의 첫 부분이다.
이 기사를 시작으로 국제앰네스티는 지난 50년 동안 무력감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변화로 가는 인권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무관심하고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이러한 분노를 행동으로 모아서 변화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피터 베네슨이 상상했던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작은 힘을 모아 큰 힘으로 만들어 불의라는 높은 벽을 무너뜨려왔던 것이다.
국제앰네스티 20주년 행사에서 피터 베넨슨 창립자가 촛불을 켜고 있다
1961년 앰네스티는 정부에 반대하면 누구든 가두어 둘 수 있고 정부가 저지른 범죄는 처벌 받지 않는다는 당시 인식에 도전장을 내민다. 역사의 폭넓은 맥락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흉악한 일을 꾸미는 음모가 가득 찼다면 앰네스티는 인권의 이름으로 양심수를 위한 ‘희망음모’의 촛불을 밝혔다. 이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로 부당함에 맞서면서 냉전체제에서 억압 받던 수 천명의 양심수들을 위해 강력한 저항연대를 결성한 것이다.
앰네스티 첫 10년 동안, 피터 베넨슨 개인으로 시작된 앰네스티 활동이 소규모의 자원활동가 그룹에서 27개가 넘는 국가에 18개의 지부와 850개의 그룹으로 성장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앰네스티 활동이 시작되면서 ‘양심수(Prioner of conscience)’라는 말은 곧바로 국제통용어가 되었고 이 운동의 상징으로 대표 되었다. 또한 철조망에 둘러싸인 촛불은 전세계적으로 희망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앰네스티의 효시인 ‘사면을 위한 탄원활동(Appeal for Amnesty) 1961’이 시작된 직후인 7월 첫 번째 국제회의가 열린다. 벨기에, 영국, 프랑스 등 7개국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표현과 종교의 자유 옹호를 위한 지속적인 국제운동’수립을 결정하고 지리적·정치적 배경이 상이한 3명의 정치수를 선정하는 세 가지 네트워크(Threes Network)라는 원칙도 결정한다. 이처럼 앰네스티는 초창기부터 그룹활동의 불편부당성을 견지하고 국제적인 연대를 위한 활동원칙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앰네스티의 첫 번째 상징물인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초는 그 해 12월‘백만인의 무고한 사람들을 위한 청원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밝혀졌다.
런던에 처음 문을 연 국제앰네스티 사무실
다음해인 1962년부터 앰네스티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월 가나를 시작으로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양심수인 요제프배란(Josef Beran) 대주교의 사면을 위해 활동했고 그 후 포르투갈, 동독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재판을 참관했다. 넬슨 만델라는 재판 후에 국제앰네스티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그가 준 도움뿐 아니라 그가 재판정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는 크게 격려받고 고무되었다.”
그 해 7월 벨기에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모든 그룹들이 만장일치로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라는 영구적 조직 수립을 결의한다. 그리고 1963년 런던에 국제사무국을 설립하고 각 국가들의 정치적 수감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 위해 자원활동가들로 구성된 조사연구팀을 설립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권보고서가 탄생하게 된 토대의 시작이었다. 앰네스티는 포르투갈, 루마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감 환경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를 발간하고 파라과이, 로디지아(현 잠비아와 짐바브웨), 동독의 보고서도 발간했다.
이러한 앰네스티의 보고서에 대해 국제사회는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보고서의 해당 국가 중에 하나인 동독의 언론은 국제앰네스티의 활동을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포르투갈 보고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동독에는 정치수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인권침해를 찾고 있다면 서독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앰네스티는 권력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인권단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앰네스티는 세계인권선언 제18조와 제19조를 중심으로 양심수와 정치수에 대한 활동에 집중했다. 그래서 1965년부터 매달 수인들을 위해 편지를 보내는 캠페인을 시작했고, 1968부터는 ‘양심수 주간’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과 활동이 만들어낸 첫 10년의 변화와 성과는 분명했다. 1961년 이래로 10년 동안 4,000명의 수감자에 대해 활동했고, 2,000명이 풀려났다. 그 결과 앰네스티는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어 1964년 유엔, 1965년에 유럽의회로부터 자문지위를 부여 받고, 1969년에는 유네스코의 자문지위를 부여 받았다.
인권에 열렬한 지지자였던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국제앰네스티에 헌정한 작품